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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간호조무사 유동훈,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같은 삶을 그립니다.

“간호조무사는 가장 아픈 이들 곁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그러나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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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조무사신문
기사입력 2020-05-20

열심히 하는 만큼, 보람을 느끼는 만큼, 더 나은 처우, 권익 향상을 위해 간호조무사 모두 하나 돼 지켜냅시다!”

 

  © 간호조무사신문

 

남성인 유동훈 간무사는 처음부터 간무사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었다. 꿈을 안고 20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발길은 꿈이 아닌 공사장으로 행했고, 건설현장부터 식당까지 안 해본 일 없이 생계를 위해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병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수발하며 느끼는 성취함과 보람은 지금껏 해온 어떤 일과도 비교가 안됐다. 이에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갔던 유 씨는 1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곳에서 환자 곁을 지키며 보냈다.

 

그날의 성취감과 보람을 잊을 수 없어 야간 간호학원에 등록한 유씨. 오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저녁엔 간호학원 수업을 병행했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그때를 잊을 수 없노라 회상한다.

 

간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을 시작한 그는 돈을 모아 간호대학 진학을 꿈꾸기도 했었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고 이태석 신부 같은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도 괜찮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다.

 

이에 그는 간호대학 진학 대신 음악대학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워 아이들에게 행복을 나누는 간호 인력으로 현장에서 활동하고자하는 구체적인 꿈을 키워나갔다.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살아가던 와중 지난 2010년 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에 유 간무사는 허망함과 슬픔에 빠졌다. ‘나는 정의롭게 살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온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됐고, 더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스스로 다짐하며 학업과 간무사 일에 열중했다.

 

그렇게 음악치료사 자격증을 준비하던 와중 코로나19는 전국적으로 일파만파 번져가고 특히나 대구·경북 지역의 심각성은 매일 들려오는 뉴스로 확인 할 수 있었다.

 

더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다짐한 지난날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현재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대구로 떠나는 짐을 쌌다는 유 간무사다.

 

  © 간호조무사신문

 

대구에서의 두 달 간(31~51) 지냈다는 유 간무사는 그 시간을 앞으로 나아갈 인생 지표라고 표현했다.

 

더 뜨겁게, 더 나은 세상을 밝히는 수많은 등불 중 하나로, 이 세상의 밝음이 꺼지지 않도록 지난 두 달간 경험을 앞으로 인생의 불빛을 밝히는 원료로 삼겠다고 전했다.

 

대구1생활치료센터에서 지난 두 달을 보냈다는 유 간무사. 생활치료센터가 개소한 뒤 모두 완치가 돼 문을 닫을 때까지 그 곳엔 유동훈 간무사가 있었다.

 

기존 일해오던 병원들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던 그곳에서 유 간무사는 간호인력으로 투입됐다.

 

오전·오후 매일 2번 방호복을 착장하고 건물에 들어가 간호사의 지시 사항을 이행했다. 혈압체크부터 체온측정, SPO2측정, 투약업무, 정신적으로 불안하거나 불만사항이 있는 환자 체크 등 필수적인 간호 행위부터 환자들 마음을 다독이는 것까지 간무사이기에 해낼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의 상황을 살피고 기록한 기록지는 감염 위험 때문에 반출이 불가능하다. 이에 스테이션에 있는 의료진에게 보고한 뒤 기록지는 파기하고 나왔다.

 

생활치료센터 특수성 상 경미한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모두 각기 다른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수시로 방호복을 착용하고 들어가 환자를 살피고 상태 체크 후 의료진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마치고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그에 맞는 간호를 했다. 때때로 이곳저곳 환자들 호출이 계속되면 3~4시간가량 방호복을 벗지 못한 채 환자 곁을 지켜야 했다.

 

자랑스런 간호조무사’. 남자임에도 간혹 체력이 달려 탈수 증상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간호조무사이기에, 가장 환자들을 가까이서 간호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버텨야 했다.

 

생활치료센터에도 사람이 살다보니 간혹 안타까운 사연에 방호복과 보호경을 가림막 삼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     ©간호조무사신문

 

케어하던 환자 한 명의 어머니가 코로나 치료를 받던 도중 세상을 등지셨는데, 그 환자는 완치 판정을 받지 못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하염없이 울던 그의 곁에서 그저 숨죽여 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 어떤 환자는 남편과 떨어져 각자 치료를 받던 도중 남편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치료센터로 전달됐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그 소식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완치해 나가서 남편을 만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환자에게 차마 비보를 전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는 모든 게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방호복을 입고 활동하는 육체적 피로는 물론, 정신적 고통과 답답함을 호소하며 보건의료인인 간무사들에게 막말하거나, 때를 쓰거나하는 환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느끼는 정신적 피로도 역시 그를 지치게 했다. 더불어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백신 역시 코로나 19와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그런 상황에서도 치료센터를 뒤로 하고 떠나지 않았던 건 이곳 방역 경계선이 무너지면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게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이미 국민 생활이 무너져 내려가고 젊은 청년들 일자리가 사라지고, 2의 경제 공황이 닥쳐오는 그 혼란을 서울에서 이미 보고 왔기 때문에 더더욱 최전방을 수호한다는 마음으로 지켜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대구 지역 확진자 6800명 중 6천 여 명이 완치 판정을 받자 치료센터는 급하게 문을 닫았고, 두 달의 기억이 스며 있는 그 곳에서 쫓겨나듯 떠나왔다. 그 어떤 환영이나 위로도 받을 수 없었다. 항상 환자들을 위로하고 간호하던 유 간무사에겐 그 누구의 위로도 환영도 없었다.

 

그러나 유동훈 간호조무사는 울지마 톤즈이태석 신부처럼 나누고 베풀며, 가장 아픈 이들, 힘든 이들을 위로하는 간호 인력으로서의 오늘과 내일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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